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로니코스 2세 (문단 편집) ==== [[팔레올로고스 내전]] (1321~1328) ==== [[1320년]] 장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의 형제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둘째 손자인 마누일을 죽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들의 아버지 미하일 9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살인과 방탕하고 불성실한 행동으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분노를 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후계자 자격을 박탈 당하고 만다. 계승권을 잃게 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부활절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해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후 [[요안니스 6세]]가 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등의 지지자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시르얀니스는 노황제와의 협상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공동황제에 오르며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다스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영지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두 안드로니코스들은 말이 공동황제였지만 사실상 별개의 국가였으며 두 세력 모두 자유롭게 외국과 조약을 맺었다. 1321년의 평화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는데 안드로니코스 3세 진영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르얀니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안드로니코스 3세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얻은 보상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 확실친 않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부인을 탐하기까지 해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는 설도 있다.] 결국 시르얀니스는 1321년 12월 안드로니코스 2세 쪽으로 진영을 갈아탄다. 시르얀니스는 진영을 갈아탄 대가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메가스 둑스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노황제에게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다. 허나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평화를 원했고 손자와 할아버지는 1322년 6월 영토를 2차 내전 이후로 원상복귀하는 것으로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시르얀니스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버렸고 그는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시르얀니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농노들의 지속적인 반란이 문제가 되어 1327년 2월 두 안드로니코스 사이에 새로운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내전에는 다른 발칸반도의 국가들 역시 참여했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와 동맹을 맺고 내전을 치른다. 마지막 내전의 무대는 마케도니아였다. 여러 전투 이후 테살로니카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이런 승리로 고취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계획했고 1328년 5월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이후 그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자진 퇴위하게 압박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진 퇴위하고 2년 후에 수도원에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